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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부
명지전문대학 명예교수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눈병이 생겨 아버지 태종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눈이 나빠지자 태종은 내시를 불시에 보내 숙소에 있는 책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오직 『구소수간(歐蘇手簡)』이란 책 한 권이 병풍 틈에 끼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종은 이 책을 천 번 이상 읽었다. 이 책은 중국의 대문호인 구양수와 소동파가 쓴 손편지(수간)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세종이 왕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독서하면 빼놓지 못할 사람이 김득신(金得臣)이다. 그는 조선 시대 소문난 독서광(讀書狂)이었다. 같은 책을 석 달 동안 읽고도 첫 구절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으나,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어 늦은 나이에 과거급제라는 꿈을 이뤘고 당시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34세부터 67세까지 읽은 책을 스스로 기록한 『독수기(數讀記)』에는 『백이열전(伯夷列傳)』을 1억 3,000번 읽었다고 한다. 당시 1억은 10만을 뜻하는 단위여서 지금 수치로 환산하면 11만 3,000번이다. 그는 자신이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독수기』에 적어 놓았는데 무려 36권이나 된다고 하니 천하의 독서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 친구 명모 역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후 은퇴하여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여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하루에 약 200여 쪽 분량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중요한 부분에는 밑줄을 그어가면서 정독을 한다. 이렇게 읽은 책이 1년이면 약 150여 권이 된다고 하니 그에게는 ‘공붓벌레’라는 별명이 딱 어울린다. 내가 책을 출간하면 1호 독자가 되어 정독하고 ‘정오표’를 만들어 나에게 전달해 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책을 많이 읽는 명모 친구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공부』라는 책을 집필한 고(故) 김열규 교수는 “공부는 배신이 없다.”라고 말한다. 공부해서 얻는 것은 꼬박꼬박, 그리고 차곡차곡 공부한 사람의 머릿속에 챙겨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돈을 벌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도 하고, 권력도 10년을 넘기지 못하지만, 공부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부에 대한 김 교수의 신념이다. 공부한 결과는 풍부한 학식과 지식으로 축적되고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타난다. 학식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유대인은 “지식은 도둑이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몸에 지니고 다닐 수도 있다.”“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 민족의 힘을 더 키우고자 지식을 쌓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들이 노벨상을 휩쓸고, 세계적인 거부가 된 이유는 독서 덕분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희망’을 노래하는 대신 ‘소일(消日)’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소일의 사전적 의미는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라는 뜻이다. 소일한다면 생활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에서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될 두 글자가 바로 ‘소일’이라고 했다. 이덕무도 『사소절(士小節)』에서 석음(惜陰), 곧 촌음(寸陰)을 아껴도 시원찮을 판에 시간을 보낼 궁리나 하고 있음을 나무랐다.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즉 100세 인생의 삶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공부가 답이다. 100세를 넘기고도 정정한 삶을 사는 김형석 교수는 장수의 비결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강연하고 집필하며 노익장(老益壯)을 과시하며 살고 있다. 그는 늙지 않는 비결의 하나가 공부이며, 진지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는 “소년의 배움은 해 뜰 때의 별빛과 같고, 장년의 배움은 한낮의 햇빛과 같고, 노년의 배움은 어둠 속의 촛불과 같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음악 한 소절을 연습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공부는 호흡과 같아서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