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희 (영어 교육 전문가 / 본지 편집위원)

강연장에는 입석까지 젊은 엄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아이가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죠?”라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네!”하고 외친다. 이번에는 “아이가 영어를 얼마나 잘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묻자, 대답이 없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해보는 얼굴들이다. 내가 “전 그 답을 알아요. 주변의 아이들보다 잘했으면 좋겠죠?”라고 하자, 다들 솔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15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젊은 부모들의 마음은 막연한 욕심의 바람에 휩쓸린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키우고 싶어서 불안하고 조급하다. 그래서 무턱대고 더 일찍 더 어렵고 더 많이 영어를 시키려고 한다.

영어 교육 열정이 크고 그 지출이 가능한 가정이 대부분 이런 심리로 어린아이의 영어 교육을 하고 있다. 가정뿐만 아니라 유아들의 교육을 맡는 일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도 영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기에 영어유치원과의 비교에서 위축된다. 영어 교육에 대해 자신 있는 대답을 못 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흔든다. 만약 그 시기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만드는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면 그들의 불안도 해소될 것이다.

이러한 막연한 불안에 의한 비교와 경쟁이 두드러지는 시기가 유아기와 초등학교 때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국가적으로 정해진 진도에 따라 전국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수업과 시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일관된 진도 체계가 정해지지 않은 시기에는 영어유치원이나 어린이 영어 학원이 마치 자신들이 영어 교육의 주도권을 쥔 듯 거만한 태도로 부모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그들은 임의의 잣대로 아이와 학부모를 평가하고 자신들의 요구와 태도에 적응시킨다. 그들은 주변보다 더 일찍 더 많이 더 어려운 것을 시킨다고 자랑한다.

만약 그렇게 영어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여 더 일찍 더 많이 더 어려운 것을 한 효과로 반드시 명문대를 가거나 향후의 어려운 시험들을 다 통과한다면 그 가치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없다. 소위 빡센 영어유치원의 효과도 초등학교 2학년이면 날아간다. 남는 건 파닉스뿐이었다고 흔히 실토한다. 유아기에 대단한 영어 스킬을 익혔다고 믿고 더 기량을 키우고자 초등학교 때 토플까지 해가면서 영어에 투자를 해 봤자, 예체능 재능을 닦을 시간 혹은 수학 공부를 할 시간만 축날 뿐이다. 또 그렇게 영어에 집중했는데 중고등학교에 가서 어리둥절한 영어 점수를 받아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왜 그렇게 영어에 미쳐 시간을 보냈는지 후회할 수 있다. 많은 부모가 그때 영어를 너무 많이 하느라 다른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뒤늦게 반성한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 어느 부모나 내 아이가 그런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준이 없이 남과의 비교로 평가하고 무조건 더 많이 하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안다면 아이는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되기 어렵다. 주변보다 잘해야 한다는 깊이도 모를 강박의 늪에 빠뜨려진 어린아이들이 전국의 영어 학원과 영어유치원에 허다하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해야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되는 걸까?

공부는 시기마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시기마다 배워야 할 것을 효율적으로 잘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유치원부터 저학년까지의 어린아이에게 의미 있는 영어 교육의 성과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좋은 발음으로 영어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좋은 발음을 익히고, 파닉스를 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어서, 영어를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다. 그것은 비싼 영어유치원이나 학원에 가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TV나 앱으로 영어를 자주 듣고, 알파벳을 배우고, 그리고 파닉스 진도를 나가는 것은 어린이집에서도 할 수 있고, 그냥 가정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방법을 아는 것이고 좋은 발음과 효율적 진도를 나가는 교재와 교수법이다.

이 점에서 많은 가정과 원어민 선생님이 없는 지역의 고민이 컸다. 돈이 많고 원어민이 흔한 지역이라면 과하게 하든 어쨌든 일찍부터 영어를 읽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곳은 읽기 자체를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파닉스를 평생 가르치면서 그 점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매우 우수한 아이도 지역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어 교육에서 소외되게 되는 것이다. 영어를 읽는 법을 늦게 배움으로써 학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원어민 선생님이 옆에 있는 것처럼 진도를 나갈 수 있는 파닉스 책을 만들어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보급하고 싶었다. 큐아르 코드와 유튜브가 세상에 만들어지면서 이런 나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단순히 핸드폰으로 큐알 코드를 비추면 원어민의 친절한 수업이 시작되고 아이는 멈추었다 켰다 하면서 원어민 발음을 배우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진도를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산간벽지에서도 혼자서도 좋은 발음으로 영어 읽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무경험자도 좋은 파닉스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교재만 있으면 교육 격차도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특정한 비싼 곳에 가야만 파닉스를 배울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결국,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은 좋은 발음으로 영어를 읽을 수 있으면 영어를 잘하는 아이이다. 어려운 스펠링 테스트를 다 맞고 영어로 말을 많이 할 줄 알아야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 나이 때는 틀린 단어와 엉망인 문법으로 말해도 발음이 좋으면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을 한들, 글을 읽을 줄 모르면 아이의 영어는 늘지 않는다. 스스로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읽은 만큼 말하고 쓸 수 있는 데이터를 쌓는 것이므로 글을 모르고 단순히 듣고 말하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키워준다. 실제로 이 시기에 좋은 발음으로 말을 잘해도 글 읽기가 안 되면, 말은 마른 씨앗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미국에 살다 온 아이도 글을 깨우친 아이는 계속 영어 능력을 키우지만, 글을 못 깨우친 아이는 자신이 말을 잘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뒤늦게 읽기를 배우는 경우를 보았다. 미국 교포의 경우도 한글을 깨우치고 간 아이는 계속 한국어를 잘하지만,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간 아이는 완전히 한국어를 잊어버린다. 결국, 말이 뿌리내리고 자라는 터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의 공교육은 이제서야 비로소 파닉스가 강화되었다. 얼마전 까지는 초등 영어 수업은 말을 할 수 있는 영어 교육을 표방하며 스피킹 위주의 훈련이었다. 미국 기사로 읽은 바로는 외국어 학습은 9세 때까지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9세면 언어의 문이 닫힌다고 표현되어 있었다. 학교 측은 그러니까 9세까지는 모국어를 확립시키고 이후에 영어를 시키자는 것이고, 부모들은 언어의 문이 닫히기 전에 영어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