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독서교육의 방향
독서의 속도와 깊이
한때 속독법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글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공부 효과를 극대화해 준다는 것이었다. 속독이 과연 의미 있는 독서 방법이었는지 다소 의문이 든다. 독서는 텍스트상의 글자를 단순히 눈으로 훑어 파악하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 독서는 텍스트에 담긴 메시지를 독자의 선행 지식이나 경험, 관점이나 신념과 연계·융합하여 의미를 구성해 가는 고도의 인지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같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여도, 독자마다 글을 통해 얻는 생각과 느낌이 달리 나타나게 된다. 읽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게 되면 텍스트에 대한 정교한 의미 해석이 쉽지 않으며, 독서를 통한 사색과 성찰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독서의 속도와 깊이는 때로 상충(trade-off) 관계에 있다.
효율성을 가져다주는 기술의 한계
10여 년 전,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유리감옥(The Glass Cage)』이라는 책에서 기술로 인한 자동화가 인간의 독창성과 사고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술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은 기계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 처리함으로써, 인간이 그 시간에 더욱더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나타났다. 자동화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인간은 기계가 제공하는 업무 결과를 깊이 있게 검토하거나 오류를 분별하는 데 실패하기도 하였다. 자동 비행으로 인한 조종사의 항공기 조작 미숙, 판독 데이터의 자동화로 인한 의사의 검진 업무의 수동적 대응 사례 등이 그러하다.
고도화된 기술의 집적체인 AI 기술 역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도 이와 비슷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미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생성형 AI는 정보 탐색, 텍스트 요약, 보고서 작성과 발표 준비 보조 등에서 학습과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편리함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인간의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능력을 강화한다고 볼 수 있을까?
건강관리와 독서의 공통점
독서는 건강을 관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일하고, 적절히 쉬며,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할 때 건강한 몸이 유지된다. 과도한 업무로 지친 몸을 건강보조제나 약으로 단기간에 해결하려 할 때 근본적인 건강 회복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들이 하는 건강 이야기는 다들 비슷하다. 건강을 위한 별도의 비약은 없는 듯하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선택하여 읽고,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과 토론하며 읽은 내용을 되새길 때 비로소 독서에서 얻은 내용이 내면화될 수 있으며, 독자가 갖는 인식의 지평이 점차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독서에서 별도의 획기적인 비책은 없다.
AI 시대 요청되는 문해력 교육의 새로운 측면들
다만 AI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시대의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AI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 경쟁력 약화나 사회적 소외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곧 도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정책 차원에서도 기존의 문해력 개념을 확장하고 이를 교육의 내용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다. AI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독자들은 전통적인 문해력 교육 외에, 인공지능과 더불어 의사소통하고, 학습하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 기능,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중 AI가 생성하여 제시한 텍스트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환각(hallucination) 현상처럼, AI는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답을 생성하여 제시하기도 한다. AI가 편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시된 경우, 그 응답 역시 편향된 답을 내놓기 마련이다. 또한 독자는 AI가 생성한 텍스트는 원본을 기반으로 하되 이를 조합하여 재생성한 시뮬라르크(Simulacre)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고려할 때 학생들은 AI가 생성한 텍스트를 읽을 때 다음의 내용들에 대해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비판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AI가 제공한 정보가 사실에 기반한 것인가? ▲AI가 제시한 논거, 문헌, 관련 자료는 충분히 뒷받침되어 있는가? ▲AI가 제시한 정보가 편향되어 있지는 않은가? ▲AI가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답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AI가 제공한 정보가, 다른 외부 정보와 비교할 때 상충하지는 않은가?
한편, AI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글이나 정보를 어디까지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적 고민과 기준이 필요하다. 또한 AI를 활용한 이용자가 AI에 과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과제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과정에서 AI를 적절히 인식하여 사용하고 있는지와 같은 메타인지에 대한 교육도 현장에서 함께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교육정책의 우선순위, 여전히 ‘깊이 있는 독서’
AI는 정보에 대한 접근과 해석을 더욱 더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학생들은 AI를 통해 방대한 정보를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모르는 부분은 바로 재질문하며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 기반의 독서는 기존 방식보다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이 학교 교육에서 요구되는 문해력 교육의 본질을 대체할 수 있는가? 독서를 교육할 때는 AI의 활용 이전에, 깊이 읽기, 비판적 추론, 사유의 확장이라는 핵심적인 역량을 기르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독서는 독자가 텍스트에서 직접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삶과 연결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있다. 이러한 과정 없이 AI 도구만을 앞세운 문해력 교육은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있다. 적어도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정책을 수립할 때 우선순위는 효율성이 아니라, 해석과 성찰, 그리고 독립적 사고를 기르는 깊이 있는 독서에 두어야 하겠다. <출처: 교육정책 네트워크 정보센터, 포럼 통권 385 발췌>
▲ 김종윤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원 현 진주교육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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